
노년에 이르러 작은 술잔 하나를 만들어 입술만 적셨을 뿐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술 마시는 법은 물론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책을 써야 하는지도 일러준다. 18년의 유배를 끝내고 57세 초로의 나이에 자유의 몸이 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선생은 젊은 나이에 죽은 며느리 무덤을 먼저 둘러봤다. “시아버지 섬기기 1년뿐이니 나는 그 어짊을 알지 못하나/ 시어머니 섬기기 17년이라 시어머니는 너를 두고 예쁘다 하네.” 며느리 심씨는 다산의 둘째 아들 학유의 아내로 1800년 봄 열네 살에 시집왔다. 그해 여름 정조가 승하하고 다음 해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됐다.
백성을 사랑한 실학자, 정약용
하피첩은 글씨가 쪽마다 다양한 서체와 크기로 이뤄져 있었다. 이 밖에 한국의 역사나 지리, 국어 등 국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으며, 의학이나 농업 기술, 천문 등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한편, 예술이나 문학 등에서도 서민적 성향이 크게 발달하였다. 21세기 당파싸움에 휘말린 작금의 대한민국을 200년 전의 큰어른, 다산의 눈으로 새로이 조명하여 해법을 제시한다. SalesPoint는 판매량과 판매기간에 근거하여 해당 상품의 판매도를 산출한 알라딘만의 판매지수법입니다. G뮤지엄숍은 경기도박물관, 경기도미술관, 백남준아트센터, 실학박물관, 전곡선사박물관, 경기도어린이박물관 등 6개 뮤지엄의 편의시설 뮤지엄숍을 온라인스토어로 오픈하였습니다.
정약종
북한은 정약용이 진보적 성향의 학자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봉건 지식인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가구 및 플라워 등의 상품의 경우에는 지역에 따라 추가 배송비용이 발생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서교를 지켜보던 시기 정약용은 이황의 [퇴계집]을 처음 접한다. 한국경제학회장을 지낸 고승제의 [다산을 찾아서]에 관련 기록이 나온다. 정약용은 당시 이웃에서 [퇴계집]을 얻어 매일 새벽 일어나 편지글 한편을 읽은 뒤 아전의 아침 인사를 받았다. 낮이 되면 원문과 설명을 붙인 뒤 깨우치고 또 살폈다.
과의연은 “조선 후기 실학자 선현들의 한의학 비판은 부족한 점이 많지만 애초 정당한 기반이 없었던 한의학 상황에서는 응당 나올 수밖에 없는 지적”이라고 말했다. 경남미디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도 서학인 천주교 신앙 때문에 신유박해, 기해박해를 겪으면서 전라도 강진에서 18년간의 귀양살이를 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그의 고향인 광주에서 신앙과 저술생활을 하면서 여생을 마쳤다.
'기기도설'에 나온 기중기는 구리 나사와 구리 바퀴에 톱니까지 뒷받침돼야 했기에 당시 기술로는 만들지 못하리라 생각했어요. 그럼에도 사전은 정약용이 봉건 말기에 진보적 양반 계층의 입장에서 극도록 부패타락한 봉건통치배들의 죄행을 폭로하고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견해를 내놓았다고 전했다. ※ 수신거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분께서는 운영자에게 메일로 요청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창조경제를 위해서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새로운 일의 방식과 결합방법을 찾아내는 게 중요하다. 정약용은 의령이란 책을 통해 오행상극이론, 사시부조화이론, 맥상이론 등의 한의학이론을 비판한 바 있다. 특히 기존 광고에서 침술, 대체의학 등으로 한의학을 간접 비판한 것과 달리 ‘한의학은 과학중심의학으로 대체돼야 한다’며 직접 한의학을 겨냥했다.
이 책을 읽고 싶은 사람
한 사람은 가슴 속에 쌓인 것을 밖으로 풀어내 책을 지었고, 또 한 사람은 가슴 속에 쌓인 것을 붓 끝에 모아 서화로 표출했다. 이렇게 떠돌던 다산은 1808년 봄부터 1818년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다산초당(茶山草堂)에 머물렀다. 다산은 유배생활 대부분을 제자를 가르치고 저술하는 일로 보냈다. 소설 정약용은 정약용의 유배시절을 샅샅이 다루고 있으며, 정약용이 애타게 기다리던 읍중제자 황상과 해후한 뒤 75세 부부 회혼일에 질곡의 삶을 내려놓음으로써 끝을 맺는다. 실학자 정약용이 아니라 인간 정약용을, 정약용의 내면에 숨겨진 눈물, 회한, 고독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문과에 합격하면서 ‘공렴원효성’(公廉願效誠), 곧 ‘공정과 청렴으로 정성 바치기를 원하노라’는 시구절을 썼다. 공정하고 공평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나랏일을 하겠다는 결의가 담겨 있다.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다산 정약용선생이 시집가는 딸이 잘 살기를 바라며 보낸 그림편지입니다. 사전은 "정약용이 1800년에는 실학자 박제가와 종두술을 실험연구해 성공했다"며 "자연과학 및 기술에 대한 그의 연구성과는 18세기말~19세기초 우리나라의 과학기술발전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문화체험
둘레 약 5.7㎞, 높이 4~6m 성곽을 건설하는 대역사였지만 공사는 2년 9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는 바로 정약용의 능력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정약용은 도르래를 이용해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릴 수 있는 거중기와 녹로를 발명했다.
저자 윤종록은 미래창조과학부 차관을 역임했으며, 4차 산업혁명과 소프트파워 분야의 대표적인 전문가로 꼽힌다. 저자는 이런 풍부한 지식과 오랜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픽션과 논픽션을 절묘하게 결합해 멋진 소설로 만들어냈다. 여야 잠룡들이 저마다 다양한 비전을 제시하면서 대권 경쟁을 벌이고 있다.
1805년 겨울은 승려인 아암(兒庵)의 배려로 아들 정학연과 함께 보은산방(寶恩山房)에서 지냈다. 1806년 가을에는 제자 이학래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본 사이트에 게재된 모든 기사의 판권은 본사가 보유하며, 발행인의 사전 허가 없이는 기사와 사진의 무단 전재복사를 금합니다.Copyright ⓒ (주)SRB 무등일보 All rights reserved. 다산의 편지를 보면 우리가 평소 생각하던 선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1810년 다산이 강진에서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 중 "뽕나무를 심어라"라는 내용이 있다. 다산은 “생계를 꾸리는 방법에 대해서 밤낮으로 생각해도 뽕나무를 키우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며 제갈공명이 은거할 때 뽕나무를 심어서 생활을 꾸려간 게 큰 지혜임을 깨달았다는 내용을 덧붙였다.
훗날 주시경이 이를 바탕으로 발전시켰고 우두 법을 본격적으로 보급한다. 동양의 다빈치 정약용 법학 경제 행정 역사 지리 종교 문학 과학 건축 공학 의학 약학 천문 철학 음악 등 손길이 미치지 않은 부분이 없을 정도로 백과사전이며 교본이었다. 그간의 리더십이 백미러에 의존하는 저속 차량의 하드파워 리더십이었다면 이제는 가시거리 너머까지도 미리 가보는 풍부한 상상력의 소프트파워 리더십이 필요한 순간에 와 있다.
곧고 굳은 성품이 아니었다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해낸 그를 우리는 단연 선비 중의 으뜸으로 자리매김하며 본받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문학, 철학, 경제, 사회 등 다방면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그에 못지않게 교육의 측면에서도 여러 가지 공적을 남겼다. 위인전에는 단순히 역사적인 인물이 살아온 과정과 업적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약종
다산은 유배지에서 윤시유 등의 도움으로 조금씩 기력을 회복했다. 1803년 동짓날 그는 누추한 골방을 ‘사의재(四宜齋)’로 이름 붙인다. 사의(四宜)란 “생각은 맑아야 하고, 용모는 장엄해야 하며, 말은 과묵해야 하고, 행동은 중후해야 한다”는 뜻이다.
실학박물관도 바로 옆에 조성돼 조선시대 실학의 흐름을 한눈에 접할 수 있게 한다. 생가 쪽을 조금 나와 강변 쪽으로 조성된 수변공원 일대는 정약용이 이곳을 거닐면서 사색을 하고, 배를 타면서 벗들과 교유했던 곳이다. 올해 가을은 다산이 해배된 지 정확히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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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에스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ㆍ복사ㆍ배포 등을 금합니다. 조부 정향진은 “(하피첩을 잃고) 조상 뵐 낯이 없다”는 유언을 했다. 그러다 2000년 무렵 TV ‘진품명품’에 하피첩이 등장했다. 종손은 당시 집안에서 유품을 분실한 아픔을 전하고 복제를 간곡히 요청했다. 용케도 전문가의 손을 거쳐 진품과 다를 바 없는 복제본이 만들어졌다.
놀랍게도 18세기말에 정약용은 카메라의 원리를 이해하고 활용했다. 정약용은 한발 더 나아가 이를‘칠실관화설(漆室觀畫說)’이라 명명하고 이렇게 기록했다. 차를 보내주었으면 감사하게 받아 마시면 될텐데, 정약용은 이것저것 잔소리를 죽 늘어놓았다. 그런데 차를 잘 알고 차를 좋아하지 않으면 이런 잔소리도 할 수 없을 터다. 올해는 다산이 세상에 태어난 지 2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여러 곳에서 다양한 전시회와 함께 그의 삶과 업적을 조명하는 학술행사가 열린다.
소설은 다산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실제 역사에서 정약용은 1818년 18년간의 긴 유배에서 풀려나 귀향길에 오른다. 그사이 주군 정조대왕이 세상을 떠났고, 평생의 벗이었던 형님 정약전마저 유배지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문화
순성(巡城)은 국궁 체험장이 있는 연무대에서 화성열차를 타고 서장대 아래에서 내려 시작하는 것이 좋다. 정약용은 남양주 시절에도 차를 좋아했지만 유배지에서 더욱 열심히 차를 마셨다. 유배지에서 울화를 가라앉히는 데도 차가 효과적이었다. 방에서 하루 종일 공부하고 가르치고 집필하느라 지친 몸과 마음을 차로 다스렸다. 그러니 정약용에게 차는 약용(藥用)의 단계였다고 할 수 있다.
57세에 유배에서 풀러 고향에 돌아온 다산은 '흠흠신서', '아언각비' 등을 저술하고, 이루어진 저술은 수정, 보완하며 자신의 생애를 정리하다. 관료 생활 18년, 유배 기간 18년, 고향에서 말년 18년이란 특이한 족적을 남기고 결혼 60주년이 되는 날 회혼일에 75세를 일기로 한많은 생을 마감했다. 시대를 뛰어 넘는 위대한 인물이 역사속으로 서라짐을 슬퍼하듯 큰 바람이 몰아치고 누런 흙가루가 날렸다고 한다. 정조가 서거하고 순조가 즉위 한 1801년 신유사옥이 발생하자 천주교인으로 연루된 정약용은 포항 장기로 유배된다. 9개월 후 황사영 백서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또 연루되어 서울에 불려와 조사 받고 전남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강진에서의 18년간의 긴 유배시절은 개인적으로는 참담한 고통의 세월이었으나, 후세를 위해, 미래를 위한 500여 권의 금쪽 같은 저서를 남긴 소중한 기간이었다.
조선시대에 꿰미는 한 관(貫)을 의미했는데, 한 관은 10냥, 1냥은 100문(푼)이었다. 엽전 열 꿰미는 엽전 100냥, 즉 엽전 1만문을 의미했다. 지난해 9월 기획재정부는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천 냥의 가치는?
그의 실학적 세계관은 주자학의 지배이념을 거부하고, 경전이 추구하는 본래의 정신적 기본과 시대적 변혁의 논리를 끌어내 새로운 경학(經學)을 열어주는 길을 제시하였다. 『교과서 저학년 위인전 시리즈』는 각계각층의 전문가들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해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박 이사장은 조선 후기 실학, 그중에서도 방대한 저술과 혁신적인 학문 풍토로 일가를 이룬 다산 정약용에 대한 연구를 '다산학'으로 정립해야 한다고 일찌감치 주장해왔다. 그의 이번 신간에서는 다산의 개인적인 삶에서부터 고차원적인 학문적 개념들에 이르는 '다산학' 연구의 전모를 만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유학의 핵심적 가치관은 중화민족의 소중한 역사적 자원과 정신 재부이며, 그것은 현시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핵심적 가치관의 건설에 중요한 역사적 경험과 전통적 자원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사회를 보는 시각이나 뛰어난 능력으로 인해 정약용은 개혁 정치를 추구하였던 정조의 사랑을 받았다. 정약용은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반대파의 공격을 받았으나, 정조의 도움으로 안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조가 죽은 직후 일어난 천주교 박해에 연루되어 전남 강진에서 18 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였다. 일상블로그 기간에 정약용은 자신의 생각과 연구를 담은 유명한‘여유당전서’를 남겼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도 자신의 개혁 사상을 사회에 직접 적용할 기회를 끝내 갖지 못한 채, 실학기 최고의 사상가로 일생을 마쳤다.